최근 수년간 스릴러 장르의 B무비들에는 제한적인 인지 감각을 가진 살인마 또는 괴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소재의 영화가 유행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소리를 내지 않아야 하거나 스스로의 눈을 가리는 등의 방법으로, 곁에 있지만 "들키지 않아야 하는" 상황에서의 긴장감을 주된 소재로 하는 <맨 인 더 다크 (2016)>, <콰이어트 플레이스 (2018)>, 넷플릭스 영화 <버드 박스 (2018)> 등과 같은 작품들이 그러하다. 그리고 그것들은 나름의 성공을 이끌어 내었고, 일부는 속편도 제작 중이다.
<The Invisible Man 인비저블맨 (2020)>은 이것들과 비슷한 맥락인 것 같기도 했다. 다만 <인비저블맨>은 그와는 반대로 무엇인가가 나를 항상 지켜보고 있지만 나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 존재를 상대해야 한다는 점에서 차별점을 두려 한 것이라 예상했었다.
1) 낡고 한계를 가진 소재. 그 선입견의 역발상
투명인간에 대한 이야기인 <인비저블맨>의 소재는 굉장히 낡은 과거로의 회기로 느껴졌었다.
일반적인 호러영화들은 빌런이 공포스러운 외모를 가지거나 조건반사적 공포감을 상징하게끔 외형적 요소를 설정하거나, 또는 반복되는 참혹한 살해 모습을 최대한 끔찍하게 "보여줌"으로써 시각적 요소를 관객의 공포심을 끌어내는 데 최대한 사용한다. 고전적 투명인간은 프랑켄슈타인, 드라큘라, 늑대인간 등의 캐릭터들과 같은 영역으로 다루어졌는데, 역시 외형적으로 기괴함을 부여하기 위해서 미라처럼 붕대를 온몸에 감는 방법을 쓴다거나, 비교적 최근의 <할로우 맨>처럼 속이 빈 껍데기만 가진 무표정하고 기괴한 실리콘 마스크를 쓰는 방법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심령적인 존재가 아니고 단지 보이지 않는 인간일 뿐인 투명인간의 존재감을 사물들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으로 표현하기에도, 그리고 그것에서 공포심을 느끼기에도 더 이상 사람들은 그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다.
현대에는 영화에서 이러한 위치에 있는 투명인간을 영화의 소재로 만들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관객들로 하여금 투명인간을 투명인간으로 '보이게' 만드는 작업이 요구된다. 피아노줄이나 크로마키 등을 활용해 저절로 움직이는 물건 등으로 눈에 안 보이는 존재를 표현하는 것은 이미 닳고 닳은 고전적인 방식일 뿐인 것이다. 투명 위장술을 쓰는 외계 사냥꾼이 등장하는 <프레데터 (1987)>는 그것이 투명 상태일 때는 어렴풋한 윤곽으로써 "투명한 무엇인가가 보이게"하는 방식이었다.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투명 인간의 사랑 (1992)>에서 CGI가 조금씩 더 적극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했고, <할로우 맨 (2000)>에서 이미 경험했다시피 안 보이는 존재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CGI 기술이 요구되는 경험을 이미 했었다. 이처럼 투명인간을 소재로 하는 영화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끔 하는 기술적 전시로 시각적 신기함을 체험하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투명인간이 영화의 소재가 될 경우는 바로 이런 역설이 필연적이라고 생각했다. 영화에서 눈에 안 보이는 사람을 본다는 것이 더 이상 신기하지 않은 시대이다. 그 누구도 나와 마찬가지로 <인비저블맨>의 홍보물들을 보면서 새롭다고 느끼거나 큰 흥미를 가진 사람은 없었을 것 같다. 그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역설과 그로 인해 과거 작품들의 경험에서 더 이상 새로움을 기대하지 못할, 철 지난 소재로 여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라운 반전이 일어난다. 이 <인비저블맨>은 그 모든 예상과 선입견을 뛰어넘었다.
<인비저블맨>은 수십 명의 초인들이 동시에 우주와 차원을 오가면서 활약하는 장면에 익숙한 시대에, 매우 간단한 방법으로 엄청난 것을 보여주는 데 성공한다. 이 영화는 발상의 전환으로, 투명인간의 존재감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진부한 관점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런 건 이 영화에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나는 존재를 인지하지만 다른 이에게는 인지되지 않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누구도 보지 못하는 무엇인가를 나만 느낄 수 있다면,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문제들에 대한 고민들을 바탕으로 관객의 심리를 교묘하고 영리하게, 때로는 집요하게 활용하면서 훌륭한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2) 영화와 관객 사이의 주도권 경쟁.
주인공은 첫 장면부터 내내 심리적으로 굉장히 불안한 모습을 보여준다. 집 밖에 한 발자국도 나가기를 힘들어할 정도로 굉장한 신경과민과 피해의식에 사로 잡혀 있는 인물이다. 그녀는 자신에게만 느껴지는 이상한 현상들을 주위 사람들에게 호소하지만, 당연히도 그녀의 망상에 가까운 과민증을 알고 있는 그 누구도 그것을 믿을 수가 없다. 그녀의 설명은 말 그대로 조현병 환자들이 하는 일반적인 행동으로 보이게 된다.
그녀는 가장 가깝고 거의 유일하게 의존할 수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로부터도 하나씩 신뢰를 얻을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엄청난 고립감을 느끼게 되고, 무력함에 빠져들게 된다. 이 고립감은 그녀의 과민증을 더욱 심하게 만들어가는 악순환을 만들어내어 증세는 점점 더 심해진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주인공이 보고 느끼는 이상한 현상들을 함께 보고 있지만, 관객들도 어느 순간부터 이 현상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를 적극적으로 추리하게 된다.
'그녀가 보고 느끼고 있는 것은 진짜일까, 또는 주인공의 신경과민으로 인한 망상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은 아닐까.'
관객들은 이미 <식스 센스>에서 파생되어 유행했던 1인칭 시점의 현실 전도에 대한 여러 영화들을 이미 경험했다.
급기야 관객은 주변 인물들이 물리적 폭행을 당하거나 갑자기 살해되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런데 그 일들은 주인공의 손이 닿는 거리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그녀는 정신병원에 감금된다. 그로 인해 관객의 심증은 한쪽으로 좀 더 기울어지게 된다. 주인공은 주변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심리적, 물리적 거리로부터 더욱 제한을 받게 된다. 완전한 고립이 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영화의 거의 말미에 가서야 극중의 다른 인물들도 그녀에게만 느껴지던 바로 그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함께 보게 된다. 이 영화의 본격적인 액션 장면들과 죽고 다치는 사람들이 그때부터 다수가 등장하지만, 관객들은 오히려 그 순간부터 긴장감이 이완되고 안심을 하게 되는 현상을 겪게 된다.
이것은 이 영화의 가장 큰 공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기이한 현상 그 자체보다도 누구의 공감도 얻을 수 없는 심리적 고립감이었던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내가 느끼고 보는 것을 그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고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상태에 놓일 때 느껴지는 그 극도의 공포감.
감독은 영리하게도, 극 중의 주변인들이 주인공이 느끼는 존재를 함께 인지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즉 관객조차도 확신을 할 수가 없어 공포의 요인이 되었던 고립감이 해소되는 순간부터는 벌어진 일들을 해결하고 마무리하는 것을 향해 지체하지 않고 빠르게 진행한다. 감독이 무엇을 의도했고 계산했는지가 잘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요컨대 관객이 오히려 안심이 되기 시작한 그 시점부터는 영리하게도 그리 많은 것을 할애하지 않는다. 감독은 더 이상 관객들이 신선하게 느끼지 않을 기술적 전시 따위 같은 과욕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 마지막까지 템포를 잘 조절하며 이 영화가 가진 의도대로 절제를 잘 해내었다.
(*주의: 이후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신 분만 읽기를 권장합니다!)
고립감과 감시에 의한 구속,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감시받고 옥죄던 삶으로부터 도망을 치고 숨고 싶었던 주인공은 결국 고립감을 포함한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내고, 영화 내내 압도하던 불안감을 해소하며 해방감을 획득하는 후련한 카타르시스까지 제공한다.
3) 기술의 전시 없이 심리를 역이용하는 스토리텔링
맨 앞에서 언급했듯이, 대부분의 B무비들은 대상들이 보통 보이는 그 자체로 공포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거나, 긴장감을 고조시킨 후 고요함 속에서 깜짝 놀라게 하거나 혹은 잔인한 살육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공포심을 자극하는 방법을 쓴다. 그 대상이 등장하기만 하면 공포스러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완전히 반대이다. 극 중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그냥 허공인데도 그것을 진지하게 보여줌으로써 엄청난 공포심을 느끼게 한다. 보이는 모습은 전혀 공포스러운 것이 아니다. 눈 앞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공포이고, 오히려 보이는 순간 공포스럽지 않게 되는 것이다.
관객으로 하여금 공포스러운 대상을 보여주지 않고 허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공포심을 갖게 하기까지 이 영화는 도대체 어떤 마법을 쓴 것일까. 이는 기술의 전시가 아니라 고전적 영화의 표현법과 함축적 묘사법, 그리고 레이코프가 프레임 이론을 설명할 때 사용한 표현처럼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라"라고 말하면 코끼리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심리학적 접근법 등으로 관객에게 필요한 설정들을 아주 효과적으로 주입시키는 도구로써 활용한다.
이에 대해서는 아주 인상적이었던 첫 시퀀스만으로도 설명이 가능할 것 같다.
관객은 막 시작한 영화에서 아무런 영문도 모르지만 대사도 거의 없이 단지 어느 외진 저택에서 한 여자가 몰래 탈출하는 내용의 아주 단순한 첫 시퀀스부터 관객들에게 엄청나게 인상적으로 전달한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첫 시퀀스.]
-파도가 치는 어두운 바닷가 절벽 위에 저택 한 채. 굉장히 고립되어 있는 공간임을 보여준다.
-침대에 누워있는 불안한 표정과 호흡의 여자 얼굴. 옆에 누워 있는 남자의 손은 그녀의 허리를 두르고 잠들어 있다. (남자는 여자를 애정하고 있음을 암시), 그의 손을 굉장히 조심스럽게 옮기고 침실에서 일어난다.
-안정제와 컵을 보여준다.
(여자가 옆에서 자고 있는 남자에게 무슨 일을 했는 지를 상상하게 한다. 그녀는 그를 깊은 잠에 빠뜨리게 할 이유가 필요했다)
-절벽 쪽 바다가 보이는 유리창으로 둘러싸인 침실의 남자가 누워있는 침대에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스탠리 큐브릭이 주로 활용했던 정면 좌우대칭 구도의 불안감을 유도한다.)
-작은 사다리를 옮겨온다. 조심스럽게 타고 올라가 복도의 CCTV를 조심스럽게 침실 쪽으로 돌린다.
(조심스러운 행동과 필요한 절차들 하나하나가 굉장히 불안하게 한다)
-어둠 속에서 실수로 양철 개밥그릇을 차서 큰 소음을 낸다.
(어쩌면 이때 남자가 깨지 않았을까? 이후는 남자가 자는 척 연기하는 것일 수도 있다. 훨씬 더 불안해졌다.
그리고 이 집에는 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엄청난 불안요소다. )
-지하 연구실로 보이는 곳으로 내려가서 수많은 집안 보안 카메라와 알람을 하나하나 끈다.
(남자는 집안 구석구석을 철저하게 감시를 하고 있었다. )
-옷을 갈아입으러 옷방으로 주인공이 들어갔는데, 카메라는 아무것도 없는 빈 복도를 천천히 보여준다.
(보이는 것은 말 그대로 복도의 허공일 뿐인데, 엄청난 불안감이 엄습한다. 왜 이것을 보여주는 것일까. 무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을 체험하기 시작한다.)
-몰래 차고를 통해 집 밖으로 나오는 것에 성공했는데, 그 밥그릇으로 존재를 인지했던 바로 그 개를 만난다.
(이 행동을 예측할 수 없는 동물은 어떤 행동을 할까. 급격하게 더 불안해진다.)
-주인공이 동정심으로 개의 목걸이를 풀어주는데, 탈출방지 전기충격 목걸이다.
(여러 설명이 아니라 개목걸이의 종류를 통해 주인공이 하고 있는 탈출 행위가 어떤 상황과 어떤 성향의 인물로부터 인지를 암시적으로 알려주게 된다.)
-개의 목걸이를 풀어주다가 실수로 차를 건드리고 차량 도난 방지 경보가 요란하게 울려 퍼진다. 긴박감 속에 담을 넘는다, 침실의 불이 켜진다. 남자가 깼다.
(개가 문제를 일으키지 않음에 안도하는 직후, 들켰음을 확인하게 되고 불안은 극도로 치닫는다.)
-담 밖의 숲길을 달려 외진 도로가에 다다랐고, 미리 요청을 해두었던 듯한 누군가를 조급하게 기다린다.
(외진 곳에서의 공간적 공포감.)
-멀리 어두운 숲길의 가장 끝 부분에서 차량의 헤드라이트가 보이기 시작하고 그것이 이 쪽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주인공과 관객은 쭉 그것을 지켜보게 된다.
(숲길 저 먼 곳에서 주인공의 바로 앞까지 차량이 오는 동안 쭉 불안해진다. 저 차량은 누구일까. 도움을 주는 사람일까 도망을 쳐야 할 대상일까.)
.
.
언급한 대로 내러티브상으로는 대사도 거의 없다시피한 채로 "바닷가 외진 저택에서 한 여자가 탈출하는 장면"일뿐이지만, 관객들에게 일일이 설명하는 대신 수많은 상황 설정을 단지 이미지로만 효과적으로 전달함과 동시에 매우 훌륭하게 극도의 긴장감을 전달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관객은 눈앞에 보이는 장면들만으로도 여러 상상들을 하게 되고 그 상상이 때로는 암시로 작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공포와 불안감의 씨앗으로 작용하기도 하면서 엄청나게 몰입을 할 수밖에 없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허공만 보더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공포심을 만들어내는 덫에 걸려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작품에서는 투명인간에 대한 얘기를 하는데 투명인간을 투명인간으로 '보이게' 하느라 화려한 CGI 따위는 거의 필요가 없었다. 단지 투명인간의 공포는,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음으로 인한 불안감,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설명할 수 없는 것에서 나오는 고립감임을 잘 간파하고 있었고, 이 작품은 그것을 아주 훌륭하게 표현해내었다.
-Boy: Mom! Mommy! Look!
-Mom: What?
-Boy: A Ghost!
-Mom: Don't be ridiculous. There's nothing out there.
<Hollow Man (2000)>
사족.
블록버스터급은 아닌 작은 영화긴 해도, 하필 코로나19가 세상을 뒤덮은 시기에 개봉해서 이 영화의 재미나 가치만큼은 흥행에서 빛을 못 보고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미묘하게도 이 코로나19에 대한 공포심도 이 영화와 연결점이 있는 것 같다.
코로나19의 공포심은, 바이러스는 눈에 보이지 않으며 내 주위에 누가 감염자인 지 파악을 할 수 없음으로 인한 것 같다. 한국의 대처방식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감염자를 철저하게 파악해서 가시적으로 만들수록 사람들은 공포를 덜 느끼게 되고, 반대로 감염자들을 추적하는 데 실패한 국가들은 "보이지 않음"으로 인한 공포에 패닉에 빠져드는 것 같다.
'영화 > 딥포커스의 관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숀 코너리의 사망소식. 애도와 함께. (0) | 2020.11.01 |
---|---|
2020년 1분기 개봉영화, 내가 꼽은 순위 (0) | 2020.04.16 |
[영화로 세상 읽기] N번방 사건을 보면서. -<8미리 (1999)> (0) | 2020.03.27 |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2020)> - 이야기 지푸라기들은 구성의 재미를 잡을 수 있을까. (0) | 2020.02.25 |
The Rise of Oscar: <기생충>의 아카데미 수상의 의미. (0) | 2020.02.11 |